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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여행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한 조지 거슈윈

by 솔직담백한J. 2020. 4. 30.

조지 거슈윈(G. Gershwin,1898~1937)

 

조지 거슈윈(G. Gershwin,1898~1937)은 유태계 러시아 이민의 아들로서 1898년 9월 26일에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거슈인은 모든 일에 열중하고 매우 활발한 행동력을 지녔으며 무엇인가 변화를 희구하는 남다른 성품을 지닌 아이였습니다. 거슈윈의 가족 중에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없었으며 거슈윈은 음악이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 또한 음악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골목에서 신나게 야구를 즐겼고 승마, 테니스, 수영 등 닥치는 대로 스포츠에 열중하였는데, 맨해튼 동부 지방의 롤로 스케이트 챔피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큰 키에 근육질로 다져진 몸을 자랑스러워했고 또 춤의 명수였습니다. 그리고 골프와 스키도 좋아했는데, 현대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함께 테니스를 치며 우정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거슈윈이 음악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0살 때였습니다. 같은 반 친구가 하급생들을 위해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를 연주하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서 불현듯 음악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동생 아일러를 위해 중고 피아노를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동생보다도 오히려 더 열심히 피아노를 치는 거슈윈을 위해 아버지는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거슈윈의 음악에 대한 재능은 대단한 것이어서 불과 몇 개월 후에는 행진곡을 멋지게 연주하고 작곡도 하며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거슈윈은 10살 대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 사무실에 취직하였습니다. 거슈윈 부모님의 결단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거슈윈은 음악 사무실에서 하루 10시간씩 일을 하면서 새로운 노래를 소개하고 자신의 곡을 출판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거슈윈의 첫 히트곡인 <스와니>는 최초의 축음기 레코드에 담겨 무려 2백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갑니다. 그는 불과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명성과 더불어 돈더미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실 고전음악으로 시작했지만 팝 뮤직에 끌리게 되면서 마침내는 파퓰러 송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미스터 음악'으로 불리던 거슈윈과 '미스터 가사'로 불리던 그의 동생 아일러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많이 써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거부가 된 두 형제는 허드슨 강이 내다보이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의 호화 아파트 두 채를 사들여 모여 살았습니다. 거슈윈의 아파트는 방이 무려 열네 칸이었고, 체육실에는 피아노를 들여놓았습니다. 그는 당시의 모든 음악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틈틈이 예술품을 수집하는 취미 생활도 하였습니다. 

 

거슈윈은 "분위기와 기분만 좋으면 내 손가락 끝에서 음악이 뚝뚝 떨어집니다."라고 말하며 밤마다 음악에 도취되곤 했습니다. 또 파티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파티에 모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새벽까지 작곡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조지 거쉰의 대표작 '랩소디 인 블루'

거슈윈은 24세 때 '재즈의 왕'이라 불리던 재즈 밴드의 지휘자 폴 화이트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곧 의견이 맞아 재즈풍의 멋진 음악을 만들어 도도하기 끝이 없는 클래식 음악계에 일대 돌풍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탄생된 것이 거슈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입니다. 

 

원래 이 곡은 피아노곡으로 작곡되었으며 관현악 부분은 유명한 모음곡 <그랜드 캐년>의 작곡가 퍼디 그로페의 의해 편곡되었습니다. 이곡은 '근대 음악의 실험'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이벤트에서 초연되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미국에서 홀대받고 있는 흑인이나 유태인들의 서글픈 감정을 유태인 작곡가가 사실대로 표출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초연을 지휘했던 폴 화이트는 연주 중간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직접 피아노 파트를 맡았던 작곡자인 거슈윈도 연주 도중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랩소디 인 블루>의 블루는 파랗다는 뜻이 아니라 '우울하다' 혹은 '슬프다'라는 뜻입니다. 이 곡의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클라리넷의 절묘한 상승 선율은 거슈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슈윈의 오리지널 한 발상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처음 이 곡을 연습할 때 클라리넷 주자였던 로스 고르만이 장난 삼아 미끄러져 올라가는 듯한 재즈식 글리산도로 불어댄 것이 거슈윈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거슈윈은 이에 대해 "고르만이 클라리넷을 좌우로 흔들며 너무 신나게 불어 대기에 얼떨결에 '그거 좋군' 한 것이 그렇게 됐다." 고 털어놓았습니다. 

 

 

팝 작곡가로서 부동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 거슈윈의 수입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영화음악에 관여하면서부터는 당시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경제 공항에도 아랑곳없이 그의 수입은 늘어만 갔습니다. 돈 잘 버는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유럽 음악계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입이 많아진 거슈윈은 가족들을 열심히 보살피고 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도 자주 하여 모범적인 인간성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과음도 하지 않고 도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필 애연가였는데, 줄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또 아이스크림은 앉은자리에서 1리터가 넘는 것을 단숨에 먹어 치우곤 했습니다. 

 

거슈윈은 남성 친구들과의 관계를 좋아해서 그의 주변에는 그를 살뜰히 도와주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불안하고 왜 그런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어서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들과 사귀었지만 모두가 일시적인 것이었고, 어느 여성과도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사교계의 숙녀들로부터 쇼걸에 이르기까지 그는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그들과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으면서도 사창가를 드나드는 버릇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했습니다. 일생 동안 그는 이상적인 반려를 동경하고 끊임없이 그 대상을 추구했지만, 사실 그가 설정한 이상적 여성의 조건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에 그러한 여성은 그의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는지 거슈윈은 특별히 가족과는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그는 그의 바로 밑의 동생 아일러 부부의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 속에서 대리 만족의 기쁨을 맛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의 불안정한 삶에서 가장 일관된 특징은 그의 가족에 대한 믿음직한 헌신과 성실, 그리고 아낌없는 관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