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아실 드뷔시(C.A.Debussy, 1862~1918)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인 드뷔시는 1862년 8월 22일 파리 근교의 생제르맹 앙레라는 작은 전원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용 기구의 상점을 경영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었으며, 5형제 중에 장남이었던 드뷔시는 1864년 7월 31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동생들과 더불어 지중해 해안에 살고 있던 숙모에게 보내졌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다'는 지중해의 풍경을 보며 작곡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실 앙트완 아로자라는 재정가가 드뷔시의 대부가 되었는데, 그 덕에 우수한 교사 밑에서 피아노 수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0세가 되자 그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향상되었으며, 그곳에서도 그의 재능은 나타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드뷔시는 내성적이며 말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또 귀족 취향을 갖고 있었던 드뷔시는 친구들이 동전 몇 닢에도 많은 양을 살 수 있는 싸구려 사탕을 사 먹을 때 샌드위치나 마카로니, 파이 같은 고급 음식을 사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의 고상한 취향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가품 판화나 하드 커버의 희귀한 책을 사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싼 캐비아인 철갑상어알 요리를 즐겨 먹는 미식가였고, 옷도 최신 유행의 것만 입어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파리 음악원 시절에도 드뷔시는 누구 하고나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드뷔시는 사후에 이러한 평가를 받습니다. "고독 속에서 뜨겁게 달구어져 침묵에서 솟아난 소리를 창조한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돋보이는 독창력을 발휘한 예술가의 한 사람이었던 드뷔시는 학교 친구나 동료들에게서는 어떤 깊은 공감도 열정적인 우정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1884년 22세가 되던 해에 드뷔시는 칸타타 <방탕한 아들>이라는 곡으로 로마 대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로마 대상을 수상하면 2년간은 이탈리아의 빌라 메디치에 가서 연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환경 속의 생활이었으며 끼니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드뷔시는 그 생활이 싫어져 연수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그는 생계를 위하여 피아노 개인 교수를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미술적 재능도 뛰어났던 작곡가 드뷔시
드뷔시는 그림 솜씨도 뛰어나 오히려 화가의 직업을 택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회화적인 환상을 음으로 나타냈습니다. 드뷔시를 가리켜 인상파 음악의 최고봉이라고 하지만, 그 자신은 인상파 음악가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징파'라고 불리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가 인상파 음악가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마네, 모네, 세잔, 르누아르, 피사로 등과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 자주 교류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드뷔시의 그림 솜씨는 대단하고 빠른 반면에 작곡 솜씨는 형편없이 느렸습니다. 음표 몇 개 그리는 데 하루, 이틀, 때로는 며칠씩 걸렸습니다. 만일 옆에서 이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답답해 미쳤을 것입니다. 그 자신도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작곡하느니, 차라리 위조지폐라도 그리는 편이 훨씬 벌이가 낫겠다"며 캐탄 하였습니다.
바람기를 타고난 드뷔시의 성격
예술적인 재능을 지닌 천재들의 경우가 흔히 그렇듯이 드뷔시에게도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었습니다. 또 지극히 냉소적이며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이기심과 잔인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하는데요, 그가 22세 때 로마 대상을 안겨 준 칸타타의 제목이 <방탕한 아들> 이었던 것도 그의 사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바람기를 타고난 그는 18세 때인 1880년 모스크바의 폰메크 부인 딸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게 되었습니다. 폰 메크 부인은 절대로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4년 동안이나 꾸준히 차이코프스키를 재정적으로 후원해 유명해진 여성입니다. 드뷔시는 레슨을 구실로 폰 메크 부인 댁을 자주 드나들었고, 얼마가지 않아 사춘기를 지나게 된 그 집 딸을 건드리려다가 들통이 나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평생 일편단심 한 여성만을 사랑하는 모범적인 남성상과는 거리가 먼 사나이였습니다. 눈앞에 괜찮아 보이는 여성이 있으면 유부녀이든 아니든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버스를 갈아타듯이 여자를 갈아치우곤 했습니다. 이렇듯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무절제하고 이기적인 드뷔시의 행동을 개탄한 친구들은 그에게 '암흑의 완자' 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는 극도로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하며 제멋대로인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 그의 여성 관계에서 특이한 것은 그와 관계를 맺고 있던 여성 두명이 권총 자살을 시도했는데, 모두 미수에 그쳤다는 사실입니다.
드뷔시는 1887년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뒤부터 동거하기 시작한 그의 정부 가브리엘르 뒤퐁과 1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지 알려진 사실은 없습니다. 어느날 드뷔시 의 복잡한 여자 관계에 격분한 뒤퐁은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당분간 동거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끝났는지 아무도 모른채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1894년에는 여가수 테레제 로저와 약혼까지 했다가 결국은 파혼하게 됩니다. 뒤늦게 뒤퐁과의 관계를 알게 된 로저와 격렬한 입 싸움이 계속되어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아 갈라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저와의 관계를 끝낸 드뷔시는 다시 뒤퐁한테로 돌아와(?) 당분간 같이 살았습니다.
1899년에는 패션 모델인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드뷔시와 10년간 동거했던 뒤퐁의 친구였는데요, 드뷔시와 뒤퐁이 동거하던 시절 그녀는 두 사람의 집에 자주 놀러 오던 차에 그만 눈이 맞아 결혼 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텍시에와의 결혼으로 드뷔시의 바람기가 잠재워진 줄 알았지만 불과 5년 정도 지탱했을 뿐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때인 1903년 가을에 드뷔시는 어느 은행가의 부인이며 아마추어 성악가인 지기스몬드 바르닥 부인(엠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드뷔시 부부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는데, 1904년에 이르러 드뷔시는 바르닥 부인과 함께 살기 위해 아내인 로잘리 텍시에를 잔인하게 버렸다고 합니다. 드뷔시는 바르닥 부인의 돈으로 산 아파트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지만 이혼 소송 문제로 1908년이 되서야 정식 부부가 되었습니다.
드뷔시의 아내는 모욕적으로 버림받은 충격으로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요란한 가십과 스캔들 때무에 드뷔시는 이를 피해 한 동안 영국의 남부 해안으로 가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사건 후 드뷔시는 많은 후원자와 친구를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드뷔시의 '달빛' 이라는 음악을 참 좋아하는데, 드뷔시의 사생활을 알게 되니 마음이 좀 착잡하고 뒤숭숭합니다. 천재성 이면에 가려진 그의 성격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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