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은 음악의 본질이다." -Debussy(드뷔시)
드뷔시는 25년간에 걸친 작곡 생활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며 살려고 애썼던 그는 "탐험은 음악의 본질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탐구는 음악을 위한 빵이요 술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예술적 창조력의 극치가 그의 생물학적 창조력의 절정기와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점입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 구조가 추상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열쇠를 필요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곡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로 보아 그렇게 추리됩니다. 즉 <봄>, <이베리아>, <어린이의 방>, <판화>, <바다>, <베르가마스크>, <백과 흑으로>등이 그러하고, 24개의 전주곡들도 모두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악보의 처음 부분이 아니라 마지막에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표제음악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드뷔시의 음악을 「고독 속에 뜨겁게 달구어져 침묵에서 솟아난 소리」라고 표현한 사람은 프랑스의 어느 평론가였습니다. 드뷔시는 참으로 음악을 거의 '빛과 침묵'과 유사한 것으로 변형시키려고 노력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가장 견고하고 가장 자상한 전통의 화신'으로 평가될 만큼 가장 프랑스적인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독일군이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군사적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조국의 운명을 슬퍼하며 조국을 위한 애국적 작품《프랑스 찬가》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나 스케치만 남기고 결국은 미완성으로 끝났습니다. 몇 달만 더 견뎠던들 그는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직장암 수술을 받게 된 드뷔시
1905년 《바다》를 작곡할 무렵부터 드뷔시는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고통이 따랐기 때문에 키니네와 다른 진정제 등을 복용하였는데, 1907년에는 장 질환에 관한 언급이 출판업자인 뒤랑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습니다. 천재 작곡가들이 모르핀과 코카인 및 진통, 진정제 또는 흥분제를 사용하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과 같이 드뷔시도 이런 약물을 사용한다는 소문이 1909년에 나돌았습니다.
1913년에는 고질병인 치근염 때문에 고생했는데, 그 당시 스트라빈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드뷔시는 자기의 생명을 앗아갈 질병이 몸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종의 수치로만 여기고 자신의 병을 애써 감추려고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병을 키우고 악화시켜 수명을 단축시킨 셈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1915년부터 그는 줄곧 환자였던 것입니다.
그의 질환은 직장의 악성 종양인 직장암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치료로써 라듐에 의한 방사선 조사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효과를 보지 못했고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몇 달 사이에 너무나도 비참하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갖고 수술에 임했지만 성공적이지 않았고 헛된 수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드뷔시는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라듐 치료가 남아 있다는 의사의 격려와 위로에 힘을 얻어 투병 생활을 계속하였고 일시적으로 좋아질 때도 있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병석에 있는 드뷔시에게 또 다른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1917년 3월 25일에 그의 모친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드뷔시는 1917년 5월 5일, 마지막으로 새로운 작품을 바이올리니스트 가스톤 풀레와 함께 공연을 하였습니다. 이때 그를 본 사람들은 메마른 몸과 쇠약한 모습에 놀랐다고 전해지며 정신이 나간 듯한 혼미한 표정과 우울하고 기진맥진해진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암이든 말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쇠약 상태였던 것입니다.
드뷔시에 죽음
드뷔시는 결국 1918년 3월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자정을 약간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대장암이었습니다. 그의 최후의 표정은 마치 고전적인 성자상 같은 품위를 연상시켜 축복받은 모습이었다고 전해 집니다.
전기작가 발리스는 "드뷔시는 20세기 음악을 19세기의 음악과 분리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베토벤이 19세기의 음악과 18세기의 음악을 분리한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드뷔시를 고전파에 포함시키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원래 '근대 음악'은 그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의 음악가일 뿐만 아니라 전세대의 음악가이며 스승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뷔시의 시신은 3월 8일에 페르 라세즈에 매장되었습니다. 관을 뒤따른 사람은 약 20명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독일군의 포화 속에서 파리의 시가지를 동서로 가로질러 지나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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