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권력을 통한 음악의 발전
유럽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절대왕정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초기 자본주의 체계가 등장하여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근대국가가 성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울러 시민층의 성장과 자연 과학의 발달, 지리적 발견, 종교적 분쟁,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은 유럽 모든 왕가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었습니다. 이제 각 국가들은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점에 서 있었고 이러한 시대의 중심점에는 궁정과 귀족이라는 세속적 권력의 헤게모니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절대 권력은 자연히 절대 왕정과 강력한 궁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 왕정은 권력의 핵심이 전체 국민의 대표 격인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의 권력은 작금의 시각에서 볼 때 무제한적이고 초월적인 권력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보다 더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바로크 시기에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사항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요건은 신으로부터 받은 왕의 자리는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의 가치였습니다. 이러한 신성불가침 한 왕의 자리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구실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왕가들이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합당한 명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두 번째 요건은 바로 경제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인 부가 바탕이 되어야 정치적인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신성한 왕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토대가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더더욱 절대 권력은 절대적인 부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자연히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 정책과 조세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국가의 정책은 절대 국가를 이룩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위와 같은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화와 예술의 생산 및 향유 행위는 왕궁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 시민사회의 토대가 되는 시민계층의 성장 역시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분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한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철저한 신분제도에 기초한 사회였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 역시 존재하였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힘을 반영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종교적 세속적 절대 권력을 가진 자 입장에서는 권력을 유지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시민들의 힘이 필요했기에 상호 견제와 도움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바탕에서 성장한 바로크 시기는 각 나라마다 독자적인 국가 권력을 발달시켰고 절대 권려고가 음악과의 관계는 오페라의 발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국가와 교회는 모두 예술을 힘을 나타내는 수단,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힘과 신의 힘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이용하였고, 바로크 궁정과 교회에서 음악의 기능은 바로 그러한 힘이 지닌 찬란함을 극대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오페라와 같은 화려한 예술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지지가 필수적이었고 재력이 든든할수록 음악은 더욱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 이제 중상주의 사상과 일치하여 예술의 화려함은 그 자체로 절정에 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스펙터클한 오페라도 바로크 중기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궁정 오페라에서 상업적인 오페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문 경연인과 음악인들로 구성된 상업 오페라는 주로 상업의 중심지인 베니스, 나폴리, 함부르크, 런던에서 발달하였고 전형적인 화려한 궁정 오페라는 18세기 중반 이후 쇠퇴하였습니다. 궁정 오페라는 음악가에 대한 지속적인 후원과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성립할 수 있었고, 또한 17세기 절대 권력의 정치적 경제적 역동적 관계 속에서 음악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메디치 가문
이탈리아는 16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의 흐름이 17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왔습니다. 이러한 르네상스 개념은 이탈리아 건축, 회화, 조각을 최고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고 17세기 이후에도 도시 자체를 예술품으로 격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른 국가와 달리 도시 단위의 국가 형태와 화폐경제가 견고히 자리 잡고 있었던 이탈리아는 바로크 시기에 문화의 황금시기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북부 스위스 근처에 사보이 공화국과 밀라노 공화국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옆의 베네치아 공화국을 머리로 제노바와 모데나, 페라라 공화국이 바로 아래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피렌체 공화국과 시에나 공화국, 로마와 교황청을 끼고 있는 산 마리노 공화국 등 나라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닌 여러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농업이 주로 이루어지던 남부지역과 달리 북부 도시들은 개별적 도시국가의 형태로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의 꽃을 피웠습니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필요에 의해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알프스 너머 스페인, 프랑스와 긴밀히 지내기도 했지만,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여 경쟁과 전쟁의 시기를 겪으면서 수백 년 동안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하에 각 공화국 내에는 명성과 절대권력을 가진 명문 귀족 가문이 각각 존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피렌체는 르네상스부터 이어져오는 문화와 예술의 역동적 기운이 절대 권력의 힘과 결합해 음악 역사상 최초로 바로크 오페라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동적 힘의 한가운데 바로 메디치 가문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7세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의 여러 왕국 중에서도 작은 도시 국가에 불과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15세기 이래로 300년 이상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메디치 가문은 초기에 다른 경쟁 가문인 바르디, 코르사, 스트로치 가문 등과 비교해 볼 때 크게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피렌체 정치에 대한 철저한 책임감과 예술 전반에 대한 선각자적 통찰력, 결혼이 주는 부와 권력의 결합이란 기회를 통해 유럽 어느 왕가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막강한 궁정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 하에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기 당대 최고의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들이 모여 서로의 세력을 과시하며 걸작품을 쏟아내었습니다. 또한 메디치 가문 출신의 고위 성직자가 교황청에 들어올 경우 그들의 수준 높은 음악적 안목과 후원으로 가톨릭 교회 음악은 전례 없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동로마 제국의 멸망 전후로 대규모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몰려오면서 피렌체에서도 그리스 고전과 역사, 미술, 철학, 음악 전반에 대한 흥미가 촉발하였고, 그리스 비극과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극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궁정과 귀족들은 자신이 속한 가문에 대한 명예와 부를 높이 알리기 위해 축제와 행사를 통해 그 세력을 과시하였습니다. 결혼식 축하연은 이러한 모습을 외부에 알릴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행사로, 그리고 오페라는 축하연을 빛내는 최고 절정의 무대극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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