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에는 각 나라별로 다양한 종류의 음악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서양 음악사에서 주로 접하는 음악가들은 대부분 특정한 궁정이나 교회에 속하였던 음악가들입니다. 이밖에도 독일어권에서는 시립 음악가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고, 군대 활동에 기반을 둔 군대 음악가도 있었습니다.
서양 음악사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음악가 유형 중 하나가 교회 음악가입니다. 절대주의 체제의 궁정들이 등장하는 17세기 이전까지, 명성 있는 음악가들은 대부분 교회 소속이었습니다. 교회 음악가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교회 음악을 총괄하는 음악 감독, 독창가수, 합창단, 오르간 주자,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 명칭도 다양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재정과 지출 규모에 따라 고용되는 음악가의 수와 구성이 달랐습니다. 교회 음악가는 모든 나라에 있었지만,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어권에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독일어권의 칸토르는 상당히 독특한 직위입니다. 중세시대부터 있었던 직책으로 교회의 모든 음악을 조직하고 총괄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부속학교 합창단을 발전시킬 책임을 졌고, 학교에서 음악과 라틴어를 가르쳤습니다.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였던 J.S 바흐도 교회 예배 음악의 작곡 외에 교회 부속학교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임무를 병행했습니다. 한편, 칸토르는 일반 시민이 이행해야 할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시민권을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야경 임무나 군대에서 자동적으로 면제되었습니다.
교회음악에서 칸토르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음악가가 오르간 주자입니다. 실제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면에서는 칸토르보다 오르간 주자가 실력이 더 나을 때가 많았습니다. 구교의 오르간 주자는 원래 합창단의 구성원으로서 가수들과 동등하게 서열이 매겨졌고, 일차적으로는 성직자 중에서 뽑았습니다. 칸토르가 오르간 주자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적 문제와 일반 지식에 있어서 오르간 주자보다 더 박학하다는 가정에 근거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 신교에서 음악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필요성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오르간 주자의 역할이 변화하였습니다. 루터파 교회의 오르간 주자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었고, 연주 기량이 뛰어난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신학적 배경보다 음악적 능력과 기술적 지식이 필수 요소로 간주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교회 음악이 항상 교회 내부의 연주자들로만 연주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경우 부족한 재정 때문에 연주자들을 제대로 충원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합창단의 경우에는 부속학교와 대학생들로 인원을 보충하였습니다. 기악 주자의 경우에는 시립 음악가들로 보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점점 조달하기가 힘들어져 갔습니다. 거의 무급으로 이들을 활용해야 했기에 연습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아예 인원을 모으는 것조차 힘든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바흐의 전임자였던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가 이런 상황 때문에 라이프치히 시의회에 여러 가지 탄원서를 썼습니다. 그가 보낸 보고서를 보면, 적어도 4명의 독창 가수, 합창단, 둘 이상의 트럼펫 주자, 2명의 오보이스트, 3명의 트롬본 주자, 한 명의 바순 주자, 8명의 현악기 주자가 필요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창 가수들만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을 뽑아 봉급을 주고, 합창단은 주로 성 토마스 교회 부속학교 학생으로 충원하고, 악기 연주자는 시립 나팔수와 시립 현악기 연주자들로 충원하였습니다.
교회 음악가의 삶은 결코 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높은 직위라 할 수 있는 칸토르와 오르간 주자의 형편도 재정적으로 열악했습니다. 라이프치히 의회와 교회 기록에 따르면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서 칸토르들은 순회 소년 합창단이나 장례식 노래를 지휘해야 했습니다. 경제가 농사에 의존하는 마을의 경우 칸토르의 봉급은 다양한 기부 현물로 충당되어야 했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반적으로 교회음악가의 사회적 위상이 더욱 손상되었습니다. 시립 음악가와 같은 세속 음악가들이 교회 음악가의 영역을 계속 침범했고, 따라서 경제적 여건이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음악들도 세속 음악가들의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오르간 주자는 일반시민을 위해 돈을 받고 연주를 하였고, 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해 다양한 음악 외적 활동에 관계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는 오르간 주자가 작가, 음악 출판업자, 오페라 매니저로 활동하였습니다.
라이프치히 시절 J.S 바흐의 토마스 교회 칸토르로서 기본 연봉은 87-100 탈러(Thaler)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 시절의 동료였던 에르트만(Georg Erdmann)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기의 연 수입을 700 탈러 정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기본 연봉 100 탈러를 넘어서는 수입은 많은 제자들의 레슨, 작품 위촉, 기부금 등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동시대의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은 바흐와 비교해서 두 배 이상의 수입을 올렸습니다. 라이프치히보다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 도시의 특성이 다양한 부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콜레기움 무지쿰과 같은 대중 연주회를 통해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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