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커의 즉흥연주론
파울 베커(Paul Bekker 1882~1937)는 자신의 음악학적 이론체계를 폭넓은 평론가적 경험과 결합시키면서 음악의 연주와 해석 전반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그의 논문 '즉흥연주와 재생산'은 이 분야에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다음의 기본 논제를 제시합니다.
"음악 연주는 그 근원과 본질을 고찰하여 볼 때 '즉흥 예술'이다. 왜냐하면 음악이란 본래 순간의 울림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음악작품은 음의 순간적인 울림을 통해서만 진정한 존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이상적 연주를 '즉흥 연주'로 설정하였는데, 이때 즉흥연주는 악보 없이 연주하는 일반적 의미의 즉흥연주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와 대립해서 '재생산적 연주'를 매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재생산적 연주란 '악보'를 가장 중요한 법칙으로 보는 방식으로, 악보에 나타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청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연주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커는 악보로 기보 된 음악작품을 재생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악보로 기보 된 것 자체는 미완성의 것이고 음악의 반쪽을 뜻하며, 이것은 보충되고 완성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즉 연주활동은 미완성을 완성으로 이끄는 작업이므로 재생산이 아닌 생산 활동입니다.
그렇다면 '재생산'으로서의 연주에서 벗어나 모든 연주가가 추구해야 할 '즉흥 연주'란 무엇일까요? 먼저 베커는 음악이 소리의 예술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연주'가 음악의 본질적 요인인 창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곡가가 예술적 창상을 악보로 기록함으로써 음악작품의 반이 완성되고, 이것이 연주가에 의해 연주될 때 비로소 하나의 예술작품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드라마가 무대에서 말과 행동으로 재현되는 것에 의존적인 것보다 훨씬 더한 정도로, 음악은 소리의 재현에 의존적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음악작품은 연주되는 순간에 연주자에 의하여 탄생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완성을 완성으로 끌어올리는 연주가에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커에 있어서 음악 연주 예술은 연주가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된 '즉흥연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커가 피아니스트 슈나벨에게 쓴 편지에서, 그의 이상적 연주관이 잘 드러납니다.
"이상적인 피아노 독주회는 명인적인 예술의 도취와 황홀함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연주회입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작곡가 때문에 청중이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연주자 때문에, 그리고 청중을 환상의 나라로 이끄는 피아노의 효과를 보여주는 그 연주자에게 열광하는 그런 마술의 밤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줄 수 있는 연주만이 아름답고 또한 최상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즉 베커가 말하는 훌륭한 연주는 우선 '개인적인 자유' 무엇보다도 연주가의 '상상력' 그리고 '독립'이 보장된 연주입니다. 연주가는 제시된 악보를 엄격하고 정확하게 연주하기보다는, 순간적인 상상력 속에서 자유롭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연주만이 작곡가와 연주가의 내면적, 창조적 융화를 통한 순간의 울림에서 진정한 음악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고, '근본적인 창조적 개념'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베커는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즉흥연주의 대가로 리스트와 카루소를 들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베커는 즉흥연주의 방법으로 '편곡 연주'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활약했던 말러는 바그너의 연주관에서 영향을 받아 베토벤의 9번 심포니의 관현악 파트에 나타나는 주선율을 다이내믹이나 악기 편성 측면에서 강조하여 부각한 반면에, 부선율을 약화시켰습니다. 이렇게 원래 악보를 능동적으로 변형시키는 연주 방식은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말러는 자신의 연주 방식이 단순한 주관적 해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천재 작곡가의 의도를 가장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방법이라 주장했습니다. 베커는 말러와 같이 작품을 연주자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을 '즉흥연주'의 하나로 보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베커는 연주자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독자적 권리를 강조합니다. 이로써 연주가는 작곡가 또는 작품과 청중을 연결해 주는 중재자가 아니라, 작곡가와 같은 정도의 가치를 갖는 창조자의 위치까지 도달합니다. 베커의 해석이론은 연주가가 작곡가의 종속자로서 작품의 재생산을 목표로 삼는 역할에서 벗어나, 작곡가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개성과 상상력을 발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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