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는 대규모 종교 성악곡으로도 가정에서의 음악 활동과 비더마이어적 살롱 문화를 넘어 광범위한 대중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얼핏 보기에는 그런 듯했다고 합니다. 우선 장대한 관현악 미사곡이 있는데, 이 곡들이 연주될 수 있는 교회는 빈 도심에만 18곳, 주변에 48곳, 정도가 있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이미 궁정 소년 합창단의 일원으로 과거와 현재의 교회음악 레퍼토리를 폭넓게 섭렵한 상태였습니다. 한편 미사 참석자들은 음악을 감상하러 온 이들이 아니라 신자였습니다. 종교음악의 세속화 현상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음악적 공공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후 세속화 과정은 더욱 발전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예술 종교'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베토벤의 '장엄미사'나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비롯해서 슈베르트의 대규모 미사곡이 이른바 콘서트용 음악이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그에 따라 수용 계층도 이들 음악을 신성시하던 교회 신자들에서 대중적인 교향곡 음악회의 청중으로 바뀌었습니다. 슈베르트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음악회장에서의 미사곡 연주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베토벤의 '장엄미사'도 몇 곡을 발췌해서 '송가'라고 이름 붙인 뒤에야 빈에서 초연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쿠펠비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했던, 슈베르트가 기대감에 차서 기다리던 1824년 5월의 음악회에서였습니다.
슈베르트에게 교회 공동체는 자기 음악을 대중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가 17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도 고향에 있는 리히텐탈 교회에서였고, 얼마 뒤에는 같은 미사곡이 도심 교회에서도 울려 퍼졌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1814년 9월에 벅찬 경험을 맛보게 해 준 이 미사 F장조(D.105) 덕분에 슈베르트는 앞으로 작곡가로서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리히텐탈 교회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미사곡을 작곡해달라는 영광스러운 요청을 받아 이 곡이 탄생하긴 했지만, 사실 그가 초기에 작곡한 대규모 종교음악 작품들은 고향의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반년 뒤에 나온 미사 G장조(D.167)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소규모 종교곡들도 특별한 계기 없이 작곡했습니다. 그가 부모 집을 나온 뒤에 꾸준했던 교회음악 작곡을 갑자기 중단한 것도 이를 입증해주는 증거입니다.
슈베르트는 그 뒤, 1816년부터 빈 고아원에서 음악 교육을 책임지고 있던 형 페르디난트를 위해 '독일 진혼곡'(D. 621)을 비롯한 몇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1819년 12월에 '독일 진혼곡'에서 몇 악절을 발췌하여 자신이 주관하는 음악 시험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또 1820년부터는 알트레르헨펠트 교회 합창단을 이끌었는데, 나중에 슈베르트가 작곡한 '성지 주일을 위한 여섯 개의 교창'이나 '지존하신 성체' 같은 전례음악도 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초기 현악 4중주나 교향곡처럼, 슈베르트의 초기 종교 작품들이 탄생한 배경에는 이렇듯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외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벗어난 작품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긴 했습니다. 그보다 다섯 살 많은 친구 요제프 도플러는 슈베르트 가족 4중주단, 프리슐링 하트비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습니다. 1818년 가을에 도플러는 에스테르하지 백작의 헝가리 영지에 머물고 있던 슈베르트에게 새로 창립한 어느 '음악협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협회는 미사 G장조를 연주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빈 상황에서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음악협회에 대해서도 G장조 미사의 연주에 대해서도 그 이상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이 역시도 공개적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영역이었고, 이처럼 사적인 맥락은 슈베르트의 초기 성악곡이나 기악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28년 여름에 나온 그의 마지막 미사곡인 미사 Eb장조는 한 협회의 주문에 의해 작곡된 것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알저그룬트인 지금의 빈 9구의 교회음악 장려협회였는데, 교회에서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받기 어려운 음악을 장려할 목적으로 결성된 민간단체였습니다. 교향악적 스케일을 지닌 이 미사곡 역시 사적인 친분 관계를 토대로 탄생했습니다. 작품을 의뢰한 사람은 어린 시절에 리히텐탈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미하엘 홀처에게서 슈베르트와 함께 음악 수업을 받았던 미하엘 라이터마이어였습니다.
그전에 나온 다섯 번째 미사만 작곡 동기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Ab장조가 탄생한 과정도 좀 특이한데, 1819년 11월에 작곡이 시작되어 1822년 9월에 가서야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이를 완전히 끝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1825년에 공을 들여 두 번째 버전을 선보였습니다. 요제프 폰 슈 파운에게 보낸 1822년 12월 7일 자 편지에서 드러났듯이, 그는 첫 번째 버전의 연주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편지에서 슈베르트는 "황제나 황후에게 헌정하려던 예전의 생각"에 대해 언급했고, 그만큼 이 작품이 성곡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의도적이지는 않았어도,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비슷한 '생각'을 좇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렵에 베토벤은 안톤 타이버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궁정 작곡가 자리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직책은 다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슈베르트는 1826년 4월 7일에 궁정 부카펠마이스터 자리에 지원했습니다.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지만 이는 1824년부터 살리에르의 후임 궁정 카펠 마이스터로 봉직해온 요제프 아이블러에 의해 무산되었습니다. 아이블러가 "미사곡이 훌륭하긴 하지만, 황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작곡되지 않았다" 가로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그 발언이 핵심을 찌르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당시의 기준은 황제의 보수적인 음악 취향에 따라 게오르크 로이터 2세에서 플로리안 가스만을 거쳐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 베르거에 이르기까지 옛날 교회음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이미 궁정 소년 합창단 시절에 이런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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