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는 음악극을 향한 사랑에 일찍 눈을 떴다고 합니다. 그는 기숙학교 시절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이미 대학생이 된 요제프 폰 슈 파운을 따라 오페라를 보러 다녔습니다. 과거에 기숙학교 학생이었던 슈 파운은 말하자면 어린 슈베르트의 멘토였습니다. 슈 파운의 기억에 따르면, 슈베르트가 처음 접한 오페라는 그 당시 전 유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궁정 카펠 마이스터 요제프 바이글의 징슈필 '스위스 가족'과 '고아원',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였습니다. 슈베르트는 주인공 역을 부른 가수들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 감동을 평생 간직했습니다. 특히 소프라노 아나 밀더와 앞에서 언급한 테너 바리톤 요한 미하엘 포글은 슈베르트 음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일찍부터 슈베르트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스폰티니의 '베스타의 여사제' 케루비니의 '메데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오페라를 접했습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그도 기숙학교 시절부터 습관이 된 오페라 관람을 이후에도 계속 이어갔습니다. 케른트너토어 궁정 오페라극장뿐만 아니라 변두리에 위치한 레오폴트 슈타트 극장과 비덴 극장까지 찾아다녔고, 장르의 스펙트럼도 빈 민중 희극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징슈필 : '노래극'이라는 뜻의 독일어이다. 노래, 춤곡, 기악곡 등의 음악적 요소가 곁들여진 연극을 말한다. 대체로 민속적이고 밝은 분위기이다. 18세기에 시민계급의 요구에 따라 궁정 오페라에 상응하는 장르로서 발전한 징슈필에서는 노래가 아리아를, 대사가 레치타티보를 대신한다.
슈베르트 작품 목록에서 무대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합니다. 그가 남긴 전체 자필 악보 가운데 4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양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광활한 영역은 슈베르트 음악에서 가장 덜 알려진 부분입니다. 완성작만 11개나 되고, 미완성 작품도 7개나 있습니다. 대부분이 초기에 쓰였는데, 기숙학교 시절에 시작했다가 미완성으로 남은 '거울의 기사'나 두 가지 버전이 있는 '악마의 별장'이 있습니다. 둘 다 당시 유명한 극작가였던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의 대본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1년 동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여러 개의 징슈필을 내놓았는데 자유를 주창하던 젊은 시인 테오도어 쾨르너의 텍스트에 기반한 '4년간의 보초병 근무'와 친구 알베르트 슈타들러가 리브레토를 쓴 '페르난도' 그리고 괴테의 희곡에 곡을 붙였으나 단편으로만 전해지는 '빌라 벨라의 클라우디네, 요한 마이어 호퍼의 리브레토로 작곡한 '살라망카의 친구들' 등이 있습니다.
리브레토 : 오페라, 오페레타, 징슈필, 오라토리오, 칸타타, 발레 등에서 사용하는 대본 리브레토를 쓰는 사람을 리브레 티스 트라고 부른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쓴 리브레토 말고도 진지한 소재를 가지고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모두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이런 작품들로는, 실러의 동명 발라드에서 영감을 얻은 '인질'이라든가, 마이어 호퍼의 서정적인 비극을 가지고 만든 '아드 라스트, 요한 필리프 노이만의 인도 이야기를 토대로 작곡한 '사콘탈라'가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궁정 카펠 마이스터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일찍부터 꾸준히 작곡 수업을 받았습니다. 살리에리는 1800년 이전부터 이미 이탈리아 전통 장르를 가지고 주목할 만한 작곡 실험을 했습니다. 슈베르트 작품 목록에서 이탈리아 성악곡이 눈에 띄는 것도 살리에르부터 작곡을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독일어 텍스트와 관련해서는 살리에르에게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살리에르는 슈베르트가 쓴 초기의 마법 오페라 '악마의 별장'을 검토해주고는 두 번째 버전을 쓸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클롭슈토크, 휠티, 실러,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이는 과정에서 이미 복잡한 독일어 운율 체계와 낭송법을 다룬 적이 있는 슈베르트에게 과연 이런 도움이 굳이 필요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가곡과 기악 분야에서도 그랬듯, 슈베르트에게는 자신의 견해가 더 중요했습니다. 초기 무대 음악에도 분명 그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는 모델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빈 음악극은 온갖 다양한 모델을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이었습니다.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혼란을 불러올 수도 있었습니다. 1800년 무렵 빈 오페라의 다양한 유형은 지금까지도 음악사 서술을 까다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시의 빈 극장가를 예리하게 관찰하던 어린 슈베르트도 아마 상당한 혼란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중에 고전으로 인정받게 되지만 극도로 다양한 양상을 띠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들,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 스승 살리에리의 실험적인 모델, 프랑스혁명 오페라, 베토벤의 '피델리오' 같은 놀라운 혼합 장르에 이르기까지 실로 엄청났습니다. 게다가 로시니가 재해석한 이탈리아의 전통 장르도 경험했고, 또 변두리 극장을 기웃대며 징슈필과 마법극도 접했습니다. 당시 빈에서는 다채로운 음악이 곁들여지지 않은 채 순수하게 연극만 무대에 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작부터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보편주의자라 자처했던 젊은 작곡가가 일찍부터 오페라 작곡에 이끌렸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이를 가로막을 장애물은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작곡 영역과는 달리, 여기서는 무대를 정복하는 힘이 전적으로 음악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자기에게 친숙한 이정표가 유효하지 않은 새로운 제도권에 진입해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굳이 오페라 작곡에 일찍 뛰어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슈베르트 시대의 빈에서 오페라는 기묘한 특별 구역이었습니다. 기악이나 여럿이 모여 즐기는 노래와는 별개의 세계로, 그 안에서는 오페라만의 규범이 지배했으며, 초보자는 쉽게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비용은 시민들의 여흥과 사교를 위한 빈 특유의 조직 메커니즘을 통해 조달했고, 유지 보수에 필요한 돈은 후원이나 사업 같은 복잡한 방식으로 충당했습니다. 궁정은 오래전에 책임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요제프 2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될 무렵인 1782년만 해도 궁정은 독일 오페라의 중흥을 위해 모차르트의 '후궁 탈춤' 상연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궁정 오페라 극장인 부르크 극장과 케른트너토어 극장은 1807년에 귀족 조합이 결성되면서 서로 분담해서 운영을 책임졌는데, 결국은 임대료를 내는 개인 사업자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오페라 공연은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극장 운영은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변두리에 테아터 안 데어 빈, 레오폴트 슈타트 극장, 요제프 슈타트 극장 같은 사설 극장들이 세워졌으나 이들 극장도 경기 변동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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